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시골집 마당, 순자 할머니는 툇마루에 앉아 힘없이 누워있는 복실이의 등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열여섯 해. 강산이 한 번 하고도 반이나 변하는 시간 동안 복실이는 늘 할머니 곁을 지켰다. 도시로 나간 자식들의 빈자리를 채워주고, 적적한 시골 생활의 유일한 말벗이 되어주었던 충직한 가족이었다.
하지만 세월은 복실이에게도 비껴가지 않았다. 총총 뛰어 마당을 누비던 발걸음은 이제 한 발짝 떼기도 힘겨워 보였고(심한 퇴행성 관절염), 할머니의 목소리에도 귀를 쫑긋 세우던 총기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노령성 난청). 밤이면 밤마다 이유 없이 집안을 서성이거나 구석에 머리를 박고 낑낑거리는 날(인지 기능 장애 의심)도 늘었다. 잦아진 기침에 타 먹이는 심장약과 비싼 관절 영양제는 혼자 사는 할머니에게 적지 않은 부담이었다.
😥 돌봄의 무게와 답 없는 질문들
"아이고, 내 새끼... 오늘따라 더 힘들어 보이네."
복실이가 대소변을 실수하는 날이 잦아지면서 할머니의 밤잠 설치는 날도 늘었다. 축축해진 잠자리를 치우고, 잘 움직이지 못하는 복실이를 일으켜 세우고, 약을 챙겨 먹이는 일은 일흔 후반의 할머니에게는 점점 버거운 일이 되어갔다. 마음은 예전 같지 않게 힘들어하는 복실이를 보면 안쓰러워 찢어질 듯한데, 몸은 예전처럼 따라주지 않았다.
가까운 읍내 동물병원에 데려가 봐도 뾰족한 수는 없었다. 수의사는 늘 "나이 들어서 그래요. 어쩔 수 없어요.", "심장약 잘 챙겨 먹이시고, 좋은 거 먹이세요."라는 말뿐이었다. 복실이가 밤에 잠 못 자고 힘들어하는 것 같다, 혹시 통증 때문은 아닐까 물어도 "노견들은 다 그래요"라는 대답만 돌아왔다. 복실이의 '삶의 질'에 대한 깊이 있는 상담이나 다른 선택지에 대한 이야기는 꺼낼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언젠가 병원 대기실에서 다른 보호자가 "늙어서 고생시키느니 편하게 보내주는 게 낫다"고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은 뒤로는, 혹시 내가 복실이를 너무 오래 붙잡고 있는 건 아닌지, 남들이 나를 욕심 많은 노인네로 보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에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 기댈 곳 없는 막막함 속에서
답답한 마음에 도시에 사는 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복실이 많이 아프면 약 잘 챙겨줘. 근데 너무 힘들면... 이제 보내줄 때도 생각해야지." 딸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는 현실적인 무게가 실려 있었지만, 정작 할머니가 듣고 싶은 위로나 구체적인 도움은 아니었다. 오히려 '보내주라'는 말이 비수처럼 느껴졌다.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검색이라도 해볼까 싶었지만, 작은 글씨와 복잡한 화면은 할머니를 금방 지치게 했다. 어쩌다 '강아지 안락사'라는 단어를 보게 되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옆집 젊은 엄마에게 부탁해 몇 번 검색을 해보기도 했다. 화면 속에는 '노견 안락사 기준', '강아지 안락사 비용 얼마인가요?', '동물병원 안락사 절차' 같은 글자들이 가득했지만, 내용은 너무 어렵거나 차갑게 느껴졌다. 비용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알아봐야 할지, 누구에게 물어봐야 할지 막막했다. 혹시라도 읍내 병원에 물어봤다가 "개를 죽이려 한다"는 이상한 소문이라도 날까 봐 두려웠다.
'복실이가 지금 행복할까?', '내가 너무 내 욕심만 부리는 건 아닐까?', '돈이 더 많았더라면... 내가 더 젊었더라면... 복실이를 더 잘 돌볼 수 있었을 텐데.' 죄책감과 미안함, 그리고 깊은 외로움이 할머니를 짓눌렀다.
🤝 작은 연결고리, 새로운 가능성
그러던 어느 날, 읍내 장터에서 우연히 동물보호 캠페인 부스를 보게 되었다. 젊은 활동가들이 노령 동물 돌봄과 '호스피스 케어', '삶의 질 평가' 같은 낯선 단어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용기를 내어 복실이의 상황을 조심스럽게 이야기하자, 활동가는 할머니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며 공감해주었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시(市)에 노령 동물 진료와 상담을 전문적으로 하는 병원이 있고, 필요하다면 전화 상담이나 왕진 서비스도 알아봐 줄 수 있다고 했다.
☀️ 끝나지 않은 길 위에서 찾은 작은 빛
며칠 후, 할머니는 활동가의 도움으로 그 병원 수의사와 전화 상담을 할 수 있었다. 수의사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차분히 들어주었고, 복실이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삶의 질 평가' 항목들을 하나하나 쉽게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안락사는 결코 '포기'나 '실패'가 아니며, 때로는 감당하기 힘든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마지막 '배려'가 될 수도 있다는 따뜻한 위로를 건넸다. 당장 어떤 결정을 내리라고 강요하지 않았고, 앞으로 복실이의 상태 변화를 함께 지켜보며 할머니가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 약속했다.
전화를 끊고, 할머니는 마당에 엎드려 꾸벅꾸벅 졸고 있는 복실이 곁에 조용히 앉았다. 여전히 복실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명확한 답을 얻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음속을 짓누르던 막연한 불안감과 죄책감이 조금은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 그리고 복실이의 마지막을 어떻게 함께할지에 대해 좀 더 차분히 고민할 수 있게 되었다는 안도감. 할머니는 복실이의 앙상한 등을 쓸어내리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복실아, 할미랑 조금만 더 같이 있자. 힘들지 않게, 외롭지 않게... 할미가 지켜줄게." 끝나지 않은 길 위였지만, 이제는 작은 등불 하나를 얻은 기분이었다.
2025.04.15 - [반려동물 뉴스 정보] - 반려견 안락사를 둘러싼 논쟁점과 나아갈 방향 (5)
반려견 안락사를 둘러싼 논쟁점과 나아갈 방향 (5)
(4편에 이어) 안락사는 여러 윤리적 딜레마를 안고 있으며, 특히 행동 문제로 인한 안락사나 새로운 윤리적 관점들은 지속적인 논의를 필요로 합니다. 이번 마지막 편에서는 이러한 논쟁점들을
pet-post.tistory.com
'반려동물 안락사 고민'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엄마의 시간과 나의 시간, 다른 이름의 사랑 (0) | 2025.04.22 |
---|---|
✈️ 함께 갈 수 없는 길, 남겨진 너에게: 고양이 나비와 보호자 소희의 이야기 (0) | 2025.04.22 |
💔 사랑과 두려움 사이: 문제 행동 반려견 레오와 선우네 이야기 (1) | 2025.04.22 |
❤️🩹 희망과 절망의 경계에서: 중증 췌장염 여름이와 보호자 민지의 이야기 (0) | 2025.04.22 |
마지막 이별, 존엄과 사랑으로: 반려동물 안락사 A to Z (고민, 결정, 절차) (0) | 2025.03.29 |
댓글